한 마음, 한 정성을 소리에 담아

작곡가  박-파안 영희  (朴-琶案 泳姬 / Younghi Pagh-Paan)


도올 김용옥 (金容沃)교수가 작명해 주신 작곡가 박-파안 영희(朴-琶案 泳姬 / Younghi Pagh-Paan)씨의 예명, 파안(琶案-책상에 놓여진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은 세계의 음악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녀의 본체를, 일언(一言)으로 설명하는 아마도 가장 적합한 말 일것이다.

29세에 도독하여 30년이 된 지금까지도, 책상앞에 무릎을 꿇고, 수양하는 마음으로, 한음 한음에 정성을 다하는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의 자태에서, 오선지 한장 한장에 소리의 영혼을 담아내려는 그녀의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소박하다. 그녀가 써 내려가는 웅대한 곡들도 그녀의 소박함을 함축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의 음악은 청중에게 진실성을 전달하고, 공감대를 형성시키며, 귀를 귀울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어렸을때의 꿈은 건축공부를 해서, 나의 아버지처럼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인지 결국 나는, 말하자면 시간속에서, 또 음악속에서 집을 짓는 건축가가 되었지요. 특히나 나는 음들이 그냥 흘러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노자 (老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음들을 동시에 짜임새있는 하나의 잘 설계된 건축물처럼 작곡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자면, 동양화의 산수도나 풍속화처럼 말입니다. 그림의 앞부분에는 강이 흐르고 있고, 그리고 그 중간부분 빈 공간에 한 선비와 차를 끓이는 아해, 그리고... 뒷부분엔 또한 우뚝서 있는 큰 산, 그 큰 산 위로 혹은 아래에 펼쳐져 있는 구름들, 그 뒷부분에 희미하게 보이는 또 다른 형상의 산. 이 모든 스펙트럼이 동시에 음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박-파안 영희씨는 1945년 한국의 교육의 도시인 청주에서 출생, 청주 여자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열 살의 나이에 잃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그녀의 어린시절 음악과의 친숙해 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건축을 하시는 분이셨는데, 시간이 날때마다 시를 읊으시고 퉁소를 부시곤 하셨다. 그리고, 어린 박영희는 매일밤 아버지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를 지우기 위해 그녀의 언니로 부터 받은 피아노수업을 토대로, 직접 시를 지어 곡을 붙여보곤 하였다.

„1950년대 우리나라 개인가정에 피아노를 찾아보기란 거의 힘든일 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나는 진짜 피아노의 크기와 똑같은 종이 피아노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울리지 않는 피아노소리를 혼자 상상해 가면서 피아노 연습을 하곤 했었지요."

또한, 청주의 장터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경험했던 민요와 창, 판소리, 굿판 등 우리의 소리들은, 짧았던 아버지와의 추억과 함께, 지금까지도 그녀에겐 고향의 소리로 기억되어지고 있다.

1964년 한일 국교수립에 반대하며 터졌던 63사태, 1967박정희의 68 부정선거 규탄 투쟁, 1968년 한일회담반대 등의 정치적인 동요들은, 서울대 음악대학 재학시절(1965 - 1971)그녀의 의식을 자각하는 동기가 된다. 당시의 유럽의 음악풍조를 모방만 하던 작곡형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느끼며, 그녀에게 1968년부터, 국악을 공부하는 계기를 부여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국악기를 위해서 작품을 쓰는 등, 새로운 한국음악을 한국의 문화유산과 결부를 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된다.

그러한 커다란 포부와 결단에도 불구하고, 유럽으로 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까지 5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그 5년이란 긴 시간은 그녀에게 새로운, 자유로운 창작의 힘으로 촉매작용을 하게된다.

1974년 박-파안 영희씨는, DAAD 장학생으로 독일유학길에 올라 프라이부룩(Musikhochschule Freiburg i. Br.) 에서 클라우스 후버(Klaus Huber)에게 작곡을 브라이언 퍼니하우(Brian Ferneyhough)에게 분석을, 페터 푀르티히 (Peter Förtig)에게 음악이론을, 에디트 피흐트 악센펠트(Edith Picht-Axenfeld)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독일에서의 두번째 작품(1977)인 클라리넷과 현악 3중주를 위한 „만남" („Man-Nam" für Klarinette und Streichtrio) 으로 보스빌에서 개최되는 국제작곡가세미나에서 1등상 (1. Preis beim Komponistenseminar in Boswil/Schweiz, 1978) 받은 후, 자알란트 방송국(Saarländischer Rundfunk)의 위촉으로 세번째 작품을, 그리고 네번째 작품이자, 많은 젊은작곡가들의 꿈인 도나우에슁엔음악제 (Donaueschinger Musiktage)로부터의 위촉곡인 그녀의 첫 관현악곡 „소리 (1979-1980)" 가 도나우에싱엔음악제에서 발표가 되면서 작곡가 박-파안 영희로 급격히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80년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때, 그녀가 받은 도나우에슁엔음악제로 부터의 위촉은 외국인으로서 받은 위촉이라서만이 아니라, 첫 위촉 여성작곡가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다.

이런 영광과 명성을 그렇게 빨리 유럽음악계으로부터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당시 자기자신을 작곡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두 작품으로 큰 성과를 얻고 이름이 알려진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라는 법은 없지요. 두 세마리의 벌들이, 봄을 만드는 것이 아닌것 처럼 말입니다. 한 작품을 쓰고 또 한 작품을 쓰면서 언젠간가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작품이 열개가 되면 내가 나를 작곡가라고, 다시말하자면 내 직업이 작곡가라고 명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열개라고 한정한 이 작품의 수는 갯수를 뜻 하는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지요. 30대에서 40대가 될때까지 결정을 해야만 했었지요. 내가 무엇을 쓸것인지 그리고는 나는 나의 모든 정신을 음악에 몰두했어요. 약 40여곡을 완성한 지금에서야 내가 나를 작곡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것 같아요. 내가 내 자신 스스로로부터 작곡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 정말 긴 시간을 필요로 했었던것 같아요. "

 하지만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의 겸손과는 달리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제 5회 작곡가세미나 (Komponistenseminar in Boswil/Schweiz)에서 1등상 수상, 1979년 파리 유네스코 주최(Rostrum of Composers, Unesco, Paris) 작곡콩쿨에서 1등상 수상, 1980년 한국 난파음악상, 1980년 슈튜트가르트(Stuttgart)시 주최의 작곡콩쿨에서 1등상, 1980/81년 쥣베스트 방송국의 장학기관인 하인리히 슈트로벨(Heinrich-Strobel-Stiftung des Südwestfunks) 에서 작곡가 수여하는 장학생으로 선정, 체류 작품활동, 1985년 바덴 뷔르텐베르크 예술장학재단(Kunststiftung Baden-Württemberg) 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 199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선정한 여성작곡가상 수상등은 그녀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하나의 작은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파안 영희씨는 자신의 작품활동에 있어 성공의 의미를 작곡자와 연주자의 관계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

„내 작품의 연습을 마친 후 연주자들이 내게, 당신의 작품연습을 기꺼이 한다고 할때나, 혹은 연습을 하면 할 수록 연주자들이 나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때, 나는 비로소 첫 성공의 기쁨을 맛 봅니다."

연주자들로부터의 이런 코멘트들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작품에 확신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첫째로 내가 내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난 후에는 연주자들이 그들의 개성과 인격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연주를 해 주었을 때에서야, 청중들이 작품을 충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것 이지요"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특히 연주자들의 역할이 당신의 작품활동에 가장 중요한, 그들의 그런 수고와 열성없이는 자신의 작품이 존재할 수 없다고 좋은 연주인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를 한다.


작품의 경향

한국의 농요로부터 출발하는 리듬과 음의 소재, 화음의 색채면에서 라던가 흥미를 야기시키는 소리, 정적인 면과 폭동적인 영혼의 울부짓음이라던가 등의 음악의 대조적인 상황전개들은, 관상학적(인상적)으로 그녀의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미 초기의 작품에 해당되는 "소리" 에서부터 그녀의 작품미학의 중심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독일에서의 처녀작인 "드라이잠 – 노래 (Dreisam: 프라이부룩을 따라 흐르는 강의 이름)" 를 쓰는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으리만큼의 이국에서 받은 문화충격과 두번째 곡인 "만남" 을 쓰면서, 그 문화충격에서 벗어나는 치료를 스스로 하기 시작한 사실들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파안 영희씨의 작품에 있어서 이러한 한국음악과의 접목은 작품에 소재로써만 작용, 보여주는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과 음악형식에 있어서도 상호적인 역할을 한다.

음의 향방의 구조나 화음의 모체형성이라든가, 반복성, 모두스(Modi)의 성격을 띠는 장단의 발전형태, 한국의 전통적인 창, 민요, 판소리같은 표현적인 성격들을 구상해 나가는 방법, 또 한국전통악기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음과 소음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들 까지도 그녀의 작품속에서 하나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 중의 한 좋은 예로는 „타령" 시리즈를 들 수가 있는데, 여기에서 보여지는 리듬의 반복성이라든가, 한국의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표현하는 „지신굿" 에서 판소리의 한 대목을 전자음향으로 멀리서 비밀스러이 들려오는 듯 한 기법을 통하여, 우리의 민속음악과 민속문화의 특징을 무엇보다도 잘 표현해 주는것 이라 보여진다.

한국의 정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 들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작품의 제목에서도 물씬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파안 영희씨의 작품에는 한글로 쓰여진 제목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우리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우리의 정신, 영혼세계를 나타내주는 이유일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속 깊이 안주하고 있는 그리움이기도 할 것이다.


„소리" – Sori

1980년 도나우에슁엔 음악제 (Donaueschinger Musiktage)에서 연주, 소개된 그녀의 관현악작품 „소리" 를 시점으로 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은 한국적 음악과 문화유산을 토대로 하는 일면에, 그에 동떨어진 서구적인 작곡기법으로 새로운 사고와 방향성을 제시하며, 전 유럽의 중요한 현대음악제들과 음악회들에, 관심과 성장을 일깨우는데 큰 몫을 하게된다.

대편성 관현악작품 „소리" 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모든 들을 수 있는, 들려지는것의 총칭이다. 박-파안 영희씨는 이 „소리" 를 외침, 한의 울부짖음이라 설명한다.

여기에서 이 „한" 이란 어떤 특정된 누군가에게의 한이 아닌 우리민족 스스로가 역사상, 풍토지리상 억눌리고 짖밟혔던 그 옛날 부터 출발 되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둘어볼때 당시 강대국이었던 일본, 중국, 몽고등의 압박을 우리민족은 침묵으로 억눌르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 지난 날들이, 원인은 다르지만, 우리의 민족성의 하나로, 또 한의 외침으로 많이 작용했었다고 한다.

흔히 그녀에게 던져지는 „당신은 정치적인 작곡가 입니까?" 라는 질문에, 박-파안 영희씨는 서슴없이 이렇게 답변한다.

„나는 인류의 존재성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나는 결국은 정치적인 작곡가입니다.나무, 강, 벼, 보리, 동물, 등등 그 무엇하나도 환경오염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 모든것들이 오늘날 정치적인 것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작품에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음악이 아니라, 그녀의 삶에 관한 앙가쥬망(Engagement)인 것이다. 당연히, 모든 작곡가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사고표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침묵으로 그들의 앙가쥬망을 표현하는 이도 있는가 하면, 또 작품과의 아무런 관계도 수용하지 않는 이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지요. 귀에 또렷하게 쩡쩡 울릴 수 있는 소리를 말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귀를 귀울일 것 이라고요. 그때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다시말해 우리의 세대들을 명백히 증언하는 작품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녀의80년대의 작품방향성에 있어서 1980년 광주의5월은 박-파안 영희씨에게 하나의 결정적요인이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리", „Flammenzeichen / 봉화 (플람멘짜이혠)", „님", „노을", „황토" 등을 들 수있다.

„Flammenzeichen / 봉화"

1983년 작곡된 „Flammenzeichen" 은 우선 연주의 형태면이나 성격적인 면을 고려해 볼때, 우리나라 판소리를 떠 올리게 된다. 판소리연주자가 북장단에 창(노래)을 하고 아니리(말)을 하고, 몸짓도 하듯이, 이 작품 „Flammenzeichen" 에서도 마찬가지로, 1인의 연주자 (여자 성악가)에게 노래와, 말, 동시에 타악기도 연주마저도 요구한다.

처음 위촉을 받았을 당시에는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Weiße Rose(봐이세 로제)의 저항하는 삐라의 문구 („이 전단지를 복제하여 계속 나누어 주십시오... / 누가 죽은자들을 세어보았습니까? /...누군가는 먼저 그것을 시작 해야만 합니다.")들을 중심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박-파안 영희씨에게 독일의 현대사를 철저히 공부하는 시간을 가진 것 뿐만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한국사를 통찰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작곡가로써의 자신의 의무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80년대는 참 암울했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밖에서 바라볼때, 나는 그냥 작곡만 하면 되었었으니까 편안해 보였겠지만...80년대 학생운동으로 70여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민주화를 위해 길에서 투신을 하는동안, 내게는 작곡이라는 것이, 음악을 쓴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가지의 저항수단 이었었지요."

 „님" – NIM

1986-87년 도나우에슁엔음악제로 부터의 두번째 위촉작품을 받은 박-파안 영희씨는 „님" 이라는 제목으로 대편성의 관현악곡을 작곡했다.

한편으로 너무 평범하게만 들려지는 이 곡의 제목은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시 한용운씨의 „님의 침묵"과 민중시, 민족시들을 써 온 문병란씨의 „땅의 연가" 를 토대로 하고 있다.

„님 이라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고, 사랑하는 것의 총칭이지요. 부처님에게는 중생들이 님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철학자 칸트에게는 철학이 님이 되는 것 이지요. 님이란 대상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신은 님을 소유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님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환영일 뿐이지요."

미리 전달한 것 처럼, 1980대 박-파안 영희씨의 작품세계는 시대사에의 그녀의 열정을 철저히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숨쉬는 땅과 흙을 삶의 상징으로 견주어, 그 억압받던 삶의 현실표현으로, Flammenzeichen나, 땅의 연가 같은 저항적인 글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므로써 박-파안 영희씨는 당대의 그들의 아픔과 목적을 되새겨본다.

이런 한 가지의 작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주축으로, 완전한 주제를 형성해 가는 이러한 과정들은 많은 박-파안 영희씨의 작품들에서 종종 찾아볼 수가 있다.

삶의 공유성 

1990년 박-파안씨의 경애하던 작곡가 루이지 노노 (Luigi Nono) 의 죽음을 추모하며 작곡한 „마음" 은 그 이후 많은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마음, 내 마음, Mein Herz...등등.

그 이후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에의 스스로에의 질문이 그녀의 작품세계에 관심사가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만 보아도, 1992년 작곡된 „우물" 은 그녀의 삶에 전환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파안 영희씨는 우물의 의미를 „공유성" 이라 한다.

„과연 삶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골프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기름과, 물을 비교해 봅시다. 기름이 없이도 인간은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 하지요. 물은 우리가 나누어야만 하는 것 중의 하나이지요."

사람이 평화와 안녕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평등하고 공정하게 „공유"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기도 하다.

만남에의 의미

„오늘 우리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넓은 반경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문화가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오늘날의 사회를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복합적인 문화유산을 통해 우리의 삶이 더욱 풍부해 지는 것이니까요."


박영희 씨의 작품 „만남" 에서처럼 그녀의 삶에 또는 작품활동에 있어서, 평온과 집중만큼, 또한 인과관계 즉, 만남이 필수적이라 한다. 만남이 없이는 작곡은 물론이지만, 삶이 존재할 수가 없다. 성경에서도 그의 시발점이 마찬가지로 만남이며, 만남이 존재하지 않고는 문화도 존재하지않는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문화란 것은 그냥 지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가 흘러서 또 다른 문화와 다른 인류와 접목될때 진정한 문화가 결실을 맺는것 이라 하는 그녀의 신념은 작곡가 박영희로써 뿐이 아니라, 가르치는 입장에서의 자신의 의무와 책임감에 대해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독일의 카알스루에(Hochschule für Musik Karlsruhe)와 오스트리아 그라쯔(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Graz)의 초빙교수를 거쳐, 1994년 브레멘국립예술대학 (Hochschule für Künste Bremen)에 작곡과 정교수로 임명된 사실은, 독일어 문화권 사상 여자로서 최초라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얼마 후 1994년 박-파안 영희씨는 자신이 몸을 담은 대학에 아텔리에 노이에 무직(Atelier Neue Musik) 이라는 현대음악연구소를 설립시켰다. 이 현대음악 연구소는 현대음악의 작업장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브레멘시와 다른 독일의 도시들,더 나아가 다른 유럽국가에의 주체적인 홍보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소로 이해, 수용되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해가고 있는 필수성에 대해, 또는 자신이 왜 대학강단에서 수업을 하고, 제자양성에 힘을 쓰고 있는 지에 관해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수업을 통해서 나의 삶은 더욱 풍부해짐을 느낍니다. 젊은 작곡가들을 통해서 나는 그들의 고민과 그들의 정열과 또 그들의 터전을 배우지요. 결국 서로가 주고 또 받는것이지요. 젊은 작곡가들과의 만남은 동시에 내가 나의 내면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가르치는 것에 또한 나의 사명감을 부여합니다. 물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이유 하나는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젊은작곡가가 설 자리, 자신을 소개할 공간조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외되고 있는 것 이지요. 우리의 젊은 작곡가들은 그들만의 공감과 만남이 있으며, 또 이런 만남을 통해 발전 시킨 그들만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의 임무는 수업을 통해, 또 연구소를 통해 그들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 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삶의 지표

90년대 중반부터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에게는 고대 그리이스 신화가 작품에 주제로써 그녀를 매료시키고 있다.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이질성이나 상극성같은 주제는, 자신 스스로의 존재성에 관하여 또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 작품의 경향을 엿볼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써 2000년도에 독일의 하노버에서 개최된 세계 엑스포(EXPO 2000 Hannover)로 부터 위촉 작곡된 클라리넷, 트럼펫 트럼본, 2인의 타악기 연주자, 아코디언,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를 위한 " Io.(1999/2000) 를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이스 신화의 이해할 수 없으리 만큼 끔찍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주제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직접 다가옵니다. 제우스는 강의 신 이나쿠스의 딸인 이오(Io)를 보자마자 그 아름다움에 반해, 이오를 기어코 애인으로 삼지요.

제우스신의 사랑을 받던 이오는, 아버지로부터 쫓겨나 고통의 갈림길에 서서 온 세계를 정처없이 방랑하던중, 바위산에 묶여있던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게 됩니다....(후략). 쫓겨다니는 신세로서의 이오는, 역사상 최초의 <이방인>으로 현대적인 의미해석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와는 달리 중국의 한산대사(寒山大士)는 자신의 소실점을 스스로가 정했었다.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서니 사방을 돌아봐도 끝이 없구나. 고요히 앉아 있으니 아는 사람 없고 외로운 달만 찬 샘에 비치네 (후략)> 그가 읊은 시에서와 같이 그가 속세의 먼지를 털어내고, 냉산의 우듬지에 다달았을때, 자신의 존재는 간데없고, 하나의 흔적만으로 남아있을 뿐 이라고 읊은, 홀로 드러난 참다운 실상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온 대지에 밝고 밝아 걸리는 것이 없고 자신의 존재성에 의문이 없음을 말하지요."

생과 사를 초월해 한산(寒山)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덧붙여 주장하는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의 모습에서, 부동의 여지가 없이 확고한 그녀의 음악, 삶의지표를 읽어본다.

안진아 – Jin-Ah Ahn